사랑하는
할머니,
어제는 온종일 봄비가 내렸어요.
침실 창문으로는 만개한 배꽃이 몽글몽글 솜뭉치처럼 보이네요. 주말에 춘분이 지나고 이곳은 할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벚꽃이 가득히 피어올라 꽃구름을 이루고 있어요. 반면 한국은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졌다고 하네요. 아마도 꽃샘추위가 아닌가 싶어요.
춘분이었던 날 밤, 할머니와 일본의 어느 산자락에 있는 병원 로비에 함께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꿈을 꾸었어요. 할머니의 보드라운 손의 촉감, 저를 바라보시는 자상하시면서도 예리한 눈빛, 평소처럼 할머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셀카를 찍었는데 사진 속에는 저의 모습만 보이고 할머니의 모습은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기름같이 어두운 무지갯빛을 띠고 있었어요. 그제야 ‘아… 할머니께서 잠시 찾아오신 거구나’하고 생각했어요.
할머니께서는 담담한 목소리로 저에게 돌아가시던 순간의 경험을 말씀해 주셨어요. “수미야. 할미가 그날은 정말 숨쉬기가 너무 힘이 들었어. 한숨 한숨 버티는 것 자체가 어찌나 고통스럽고 가슴이 답답하던지… 네가 아직 기억할지는 모르겠다만, 아주 오래전에 할미가 간경화로 처음 병원에 입원했던적이 있었단다. 어느 날 네가 할미가 입원해 있는 병실 문을 열고 달려 들어와서는 할미를 꼭 껴안고 할미가 몸을 가둥거릴 수도 없을 만큼 꼭 잡고는 “할머니 죽으면 안 돼!”라고 애원하는데 간경화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하도 꼭 껴안고 있어서 숨이 막혀서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때 숨 막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날은 숨이 차고 많이 힘들었어.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놓고 나니 할미는 편안했다.”
할머니 말씀을 들으며 바라본 병원의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일본의 단풍은 참 고왔어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아름답던 단풍이 사실은 산불이 옮겨붙기 시작하면서 바람에 실려 오는 불꽃들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거예요. 너무 놀란 나머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화마는 병원의 벽을 모두 허물어 버릴 만큼 이미 우리 곁으로 와 있었죠. 저와 할머니는 두 손을 맞잡은 채로 마주 보고 로비 바닥에 누워 최후를 맞이했어요. 꿈에서 너무 뜨거우면 아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할머니께서 숨이 끊어지면 뜨거움도 고통도 모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셨는데, 정말 꿈속에서 그냥 편안하게 잠이 들듯이 마지막 눈을 감은 것 같았어요.
할머니,
이렇게 화사한 봄날, 할머니와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한 편 있어요. <めがね> 한국어로는 <안경>이라는 영화에요. 그 영화를 보면 사색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오거든요. 사색에 요령 같은 것이 있느냐는 숙박객 타에코의 질문에 민박집 주인 유지는 이렇게 말하죠. "노을을 보며 추억을 그리워한다든지... 누군가를 곰곰이 생각한다든지..." 그러자 그녀가 다시 한번 묻죠. "곰곰이 생각할 누군가가 있나요?"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해요. "차분히 기다릴 뿐이에요." 마지막으로 그녀가 "무엇을?"이라고 되묻자, 그는 "흘러가 버리는 것들을..."이라고 대답해주죠.
할머니 저랑 같이 '하마다' 민박집으로 봄나들이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오랫동안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이 많은 사람이니까 분명 그곳의 삶을 잘 영유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이도 튼튼하시니까 사쿠라 씨의 차가운 빙수도 맛있게 드실 수 있으실 거예요. 바다를 동경하셨던 할머니와 함께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봄날이에요. 할머니 85세 생신에 제가 정말 드리고 싶은 선물은 우리 할머니 오래 쓰셨던 안경을 제가 하나 새로 맞춰드리는 것과 할머니와 단둘이서 사색의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것 두 가지에요. 할머니 내 마음 알죠?
영화가 거의 끝나 갈 무렵, 타에코 교수의 제자 요모기군이 독일어로 아래와 같은 시를 읊는 장면이 나와요. 그러면 우리 눈앞에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봄의 바다’가 펼쳐지고, 그곳에서 자유를 만나게 되죠. 할머니께 제가 읽어 드릴게요.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길을 따라 똑바로 걸어라
깊은 바다에는 다가가지 말도록
따위 당신의 말들을 뒤로 한 채
달빛은 빠짐없이 모든 길을 비추고
어둠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보석처럼 빛난다
우연히도 인간이라 불리며,
이곳에 있는 나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무엇과 싸워 왔는가?
이제는 나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할 때
나에게 용기를 다오
너그러워질 수 있는 용기를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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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너무도 보고 싶은 할머니,
온 세상에 할머니가 아닌 것은 없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오늘같이 아름다운 봄날에는 온 세상에 할머니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 할머니 딱 한 분만 있으시면 안 될까 하는 억지를 부리고 싶어져요.
할머니 편안한 생신 맞이하세요.
사랑해 할머니!
2015년 3월 24일 (음력 2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