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1, 2017

할머니 87세 생신



사랑하는 할머니,

아름다운 우리 할머니의 여든일곱 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고요의 평온함을 느끼기 시작한 지가 채 십 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철이 들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할머니 껌딱지였던 저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목소리도 크고, 잘 웃고, 잘 울고, 덤벙거렸죠. 한참을 떠들고 웃다가 할머니를 찾으면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제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온화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시고 계셨어요. 할머니의 차분한 어조, 정갈한 옷차림, 따스한 눈빛이 지금도 또렷이 떠올라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고요 속의 평온함으로 빠져들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할머니의 품성과 고요가 닮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며칠 전 꿈에서 저는 할머니랑 등을 기대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런데 할머니께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이제는 몸이 많이 쇠약해져서 얼마 더 살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할머니 앞으로 적어도 십 년은 꼭 더 사셔야 해요.” 하면서 팔을 흔들었는데, 할머니께서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싱긋 웃으실 뿐 답변을 하지 않으셨어요. 잠시 후 저는 꿈에서 깨었고, 안타까운 현실에 물끄러미 천정만 바라보았어요. 그러자 어느새 열린 귀로 청아한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죠. 하지만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저의 가슴은 새의 부리로 쪼이는 듯한 통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애별리고'의 아픔을 처절하게 느낀 아침이었죠.

할머니,

오늘은 제가 호기심 많은 우리 할머니께 흥미로운 소식을 하나 전해드릴게요. 얼마 전 신문에서 올해 2월 22일에 미 항공우주국과 벨기에, 영국, 스위스 등의 연구자들로 구성된 국제 공동연구팀이 발표한 자료를 읽어보니, 지구로부터 39 광년(370조 km) 거리에 있는 왜성 '트라피스트-1' 주변에서 지구형 행성 7개를 발견했다고 적혀있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이라고 해요. 그렇다면 머지않아 생명체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도 반드시 이루어지겠죠? 참으로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할머니와 저도 이 광대한 우주의 한 부분이겠죠? 그렇다면 우리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할머니, 과학이 주는 위안이란 이런 것 같아요. 39광년이라는 시공간을 여행하면 반드시 그곳에는 지구를 닮은 행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반면 꿈이 주는 위안이란 잠시나마 보고픈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것.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 찰나의 순간이건 39광년이건 저는 받아들일 거예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때를 기다리고,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을 할머니로부터 배워온 저는 할머니의 손녀딸답게 잘 기다릴 수 있어요.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던 저를 말없이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시던 할머니가 계셨기에, 독서라는 좋은 취미를 갖게 된 것 같아요. 할머니의 따뜻한 격려 덕분에 중년이 된 지금도 저는 책을 읽을 때마다 할머니의 온기를 느껴요. 그리고 책 속의 좋은 글귀와 만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내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오는 경험을 하기도 하죠. 얼마 전에는 법성게의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 一卽一切多卽一"이라고 적힌 부분을 읽다가 할머니께서 늘 당부하시던 말씀이 떠올랐어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내 부모가 귀하면 남의 부모도 귀하고,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 "길가의 풀꽃도 강가의 조약돌도 소중히 여겨라." 할머니께서 주신 가르침이 의상대사의 말씀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다시 한번 할머니의 혜안에 고개가 숙어졌어요.

할머니,

꽃잎처럼 여리고 부드러운 외모와 씨앗처럼 단단하고 훌륭한 인품을 지닌 우리 할머니의 손녀로 살아갈 수 있어서 저는 행복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세상에 태어나 좋은 스승을 한 분 만나는 것도 큰 축복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미 태어나자마자 할머니의 손녀라는 특권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이것이야말로 다이아몬드 수저가 아니겠어요? 우리의 이런 귀중한 인연도 할머니께서 태어나 주셨기에 가능했으니, 오늘은 참으로 기쁘고 축복할 날이에요. 

나의 사랑 할머니,

사람의 마음이란 수억 광년을 떠나 있다가도 찰나의 순간에 온전한 합일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바로 지금 이 순간, 저를 끔찍이도 사랑하신 우리 할머니와 할머니를 끔찍이도 사랑한 제가 마주 앉아 있어요. 우리 그렇게 함께 있어요.

<간판>

어릴 적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버스에 올라
볼일을 보러 가던 길이었어

"우리 강아지, 저기 간판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읽어볼까?"

약국
사진관
동대문
이대부속병원
버스
식당
헌책방

"우리 강아지, 아구 장하다!"

나의 자존감
나의 자긍심
나의 자신감

그렇게 쑥쑥 자라고 있던
어느 봄날의 추억


2017년 3월 2일 (음력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