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할머니께,
할머니 평안하시죠? 어느새 할머니께서 저희 곁을 떠나신 지 3년이 되었어요. 오늘처럼 비가 머물 다 간 아침은 모든 것들이 물기를 머금고 있어 주위가 싱그럽기 그지없어요. 우리 할머니의 촉촉한 피부처럼, 우리 할머니의 보드라운 머릿결처럼, 우리 할머니의 낭랑한 음성처럼 그렇게 봄은 때로는 포근하게 때로는 상큼하게 저희 곁을 한결 고운 빛으로 물들여 주고 있어요. 할머니께서 계시는 그곳에도 봄은 일찍이 도래하여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이 큰 기쁨을 안겨 드리고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할머니, 제가 요즘 글을 정리하다 보니 조금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저는 할머니 생신에는 정성 들여 편지를 쓰면서, 막상 할머니 기일에 쓴 편지는 한 통도 없었다는 사실을 말 이예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제 무의식 속에 할머니께서 태어나신 날은 함께 축하해 드리고 싶고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도, 막상 할머니께서 떠나신 날을 기리기에는 저의 슬픔이 너무 깊어서 기일에 대한 저항이 더욱 컸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할머니 기일에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뭇 새로운 변화처럼 느껴져 놀랍기도 하고, 이제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을 저의 두뇌와 가슴이 함께 받아 드릴만큼의 시일이 흐른 듯 여겨지기도 해서 무상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생겨났다 사그라지는 모습이 마치 바다의 파도를 연상케 해요. 할머니께서 멀리서 바라보시는 것 만으로도 소녀처럼 설레고 좋아하셨던 그 바다 말이에요.
할머니, 믿기지 않을 만큼 한 찰나에 지나지 않았던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그나마 제가 숨 쉬고, 잠들고, 또 내일을 기원하는 것은 할머니와 제가 함께 가꿔온 추억의 텃밭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저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며, 저의 젖줄과도 같은 그 텃밭을 저는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찾아가요.
그래도 할머니가 그리운 날은 해먹에 누워 새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을 올려다봐요. 어린 시절 할머니랑 저랑 손깍지 끼고 걷던 순간에도 하늘에는 저렇게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시공을 뛰어넘어 할머니와 함께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죠.
벚꽃이 휘날리는 봄날에는 할머니께서 꽃잎 소복이 쌓인 일본의 공원에서 도시락을 드시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 장대비 쏟아지는 여름날에는 방콕의 거리에서 함께 툭툭이를 타고 빗 길을 달리다 갑자기 웃음보가 터져 서로 부둥켜 앉고 한참을 웃던 우리들의 시원한 웃음소리, 안개비 내리는 가을날에는 할머니와 비를 맞으며 낙엽 쌓인 파리를 함께 산책하던 추억, 하얀 눈 내리는 겨울날에는 할머니랑 같이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던 동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저절로 스쳐 지나가요.
할머니. 이제 할머니께서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셔서 저희 곁에 숨 쉬고 계시는 거죠? 할머니의 육신을 고통스럽게 하던 그 잔인한 통증마저도 훌훌 털어 버리시고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자연과 하나가 돼서 저희 주위에 머물고 계시는 거죠? 햇살처럼 화사하고 포근한 울타리가 되어 저희를 안전히 지켜 주고 계시는 거죠?
할머니의 생명과도 같은 자비로움, 뛰어난 유머 감각, 예리한 통찰력, 저 심해 끝까지 낮게 더 낮게 임하시던 겸손함, 백옥 같은 예의범절, 고아한 아름다움 그 어느 것 하나 할머니의 손길이 저희에게 닿지 않은 곳은 없어요. 평생을 말씀보다 행동을 통해 보여주셨던 할머니의 진실 어린 가르침의 씨앗들이 이제 저희 모두의 가슴에 하나씩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있어요. 할머니께서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던 꽃들이 저희들 가슴에 하나둘씩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행복하시죠?
할머니께 약속드린 데로 가족들 아끼고 사랑하며 잘 지낼 것이며, 할머니의 손녀로 결코 부끄러움 없도록 매사에 열과 성을 다 할 것이며, 할머니께서 항시 염려하셨던 저의 건강도 게을리하지 않고 잘 챙길 것임을 약속드려요.
할머니께서 3년 전 저희 곁을 떠나시면서 그 크신 사랑 또한 거두어 가실까 두려웠지만,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야 비로소 할머니의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다는 숭고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어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희에게 삶의 존엄성을 몸소 나토여 보여주셨던 할머니 감사하고 존경해요. 그리고 할머니를 향한 저의 사랑 역시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다는 것 잊지 마세요.
할머니 매일매일 사랑해요!
2013년 6월 9일 (음력 5월 초하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