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18, 2014
할머니 82세 생신
그리운 할머니께,
오늘은 할머니 82번째 생신이에요. 생신 축하드려요. 올겨울 한국은 55년 만에 찾아온 한파로 몹시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런 뉴스가 들려오면 할머니가 계신 곳까지 추위가 파고드는 것 같아 제 맘도 편치 않았죠. 보드라운 담요로 몸을 감싸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가슴이 아파지는 건 할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죠. 할머니께서 들으시면 당치도 않은 이야기라며 저를 오히려 꾸짖으시겠지만, 할머니를 땅에 묻고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저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올해 생신 전 날밤 꿈에 할머니께서 나오셨어요. 노을이 바라다보이는 마루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죠. 오랜만에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다시 아기가 된 기분이었어요. 과일을 먹으면서 제가 자꾸 쏟아지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걸 보시던 할머니께서 그게 신경이 쓰이셨는지, 손으로 제 앞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기시며 할미가 앞머리를 잡아줄 테니 어서 더 먹으라고 그러셨어요. 할머니 팔 아프니까 그냥 두시라고 제 앞머리를 잡고 계신 할머니 손을 내려놓으려는데 손이 어찌나 따뜻하고 부드럽던지 너무 좋아서 할머니 손을 놓아드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앞머리를 정리해서 묶으니까 할머니께서 "이러니까 우리 수미 예쁘고 참 반듯하게 생겼다" 하시며 흐뭇해 하셨어요. 그리고 우리는 손깍지를 한 채 하늘의 석양을 함께 바라보았죠.
아침에 눈을 떴는데, 꿈이 너무 생시 같다 보니 오히려 할머니가 곁에 안 계신 게 평소보다 더 큰 슬픔으로 밀려오더라고요. 제 손에 아직도 할머니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 같았어요. 부드럽던 할머니 손의 촉감도... 할머니 저는 하루도 할머니 생각을 안 하고 보내는 날이 없어요. 매일 밤 할머니 앞으로 편지/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간이 저에게는 가장 평온한 시간이며 치유의 시간이에요. 할머니께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지금 읽고 있는 책 내용을 알려드리고, 가족들의 근황을 전하는 것이 결국은 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전 잘 알고 있어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하루 중에 가장 저를 힘들게 했던 시간은 다름 아닌 저녁 7시-한국시간 오전 9시였어요. 제가 매일 할머니께 안부전화를 드리던 시간이었던지라 앞으로는 더 이상 할머니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몰라요. 예전에는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음성을 들어야만 편안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할머니께 편지를 쓰고 나서야 저의 하루가 마무리된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제 편지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할머니한데 꿈에 나와달라고 조르는 대목이에요. 할머니는 맨날 들으니까 이제 귀찮으시겠지만, 그래도 전 아주 신성한 마음으로 매일 밤 기도하듯 할머니께 애원하는 거 아시잖아요.
할머니.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제 말 기억하시죠? 할머니 저는 늘 할머니와 함께 있어요. 얼마 전에 확연 스님과 전화통화를 했는데, 제 안부를 물으시길래, 감사하게도 할머니를 꿈에서 자주 뵐 수 있어서 심적으로 위안이 된다고 말씀드리니, 누군가를 많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면 꿈에서 자주 만나는 거라면서 할머니도 제 마음을 다 알고 계신다고 그러셨어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저는 삶에 대한 집착을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있게 됐어요. 그게 할머니를 잃은 뒤 제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집착으로부터의 해방감이 제 인생관에 큰 울림을 남기게 되었죠.
하지만 아직도 마음공부가 많이 부족한 저는, 제 삶에 대한 집착은 버렸으나, 할머니의 삶에 대한 집착은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할머니께서 82세 생신을 저희와 함께 맞이하시지 못함이 너무나 애달프고, 슬프고, 안타깝고, 화가 나요. 할머니, 제가 살아 숨 쉬는 한, 할머니의 생신을 매년 함께 축하해 드릴 거예요. 먼저 가신 할머니께 넋두리를 하며 저도 나이를 먹어가겠죠. 그래도 할머니 저는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할머니 손녀로 태어난 점. 할머니를 사랑하고 할머니께 사랑받은 점. 할머니 목소리를 하루에 한 번 들을 수 있었던 점. 할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던 점. 할머니를 꿈에서 자주 뵐 수 있는 점. 눈을 감으면 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점.
할머니. 오늘은 할머니 82세 생신. 올해는 랄라가 한글을 모두 익혀서 금강경을 저와 같이 독송했어요. 할머니께서 들으시면서 웃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니, 저도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할머니 변함없이 저를 지켜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할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손녀로 살아갈게요. 저에게 너무도 많은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해준 우리 할머니의 소중한 82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할머니 사랑해.
2012년 2월 26일 (음력 2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