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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너는 지금 엄마 곁에서 곤히 잠들어 있구나. 룰루와 미니 발렌타인과 발렌타인을 품에 안고 세상에서 가장 평안한 미소를 띠고 고른 숨을 내쉬고 있구나. 생후 7개월 때 처음으로 토론토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너의 첫 비행을 기억하니? 아주 작아서 좌석도 없이 바구니 안에 누워 갔던 우리 아가.
아빠랑 엄마랑 번갈아가며 너의 기저귀를 갈고, 우유병을 물리고, 공갈젖꼭지로 달래고, 아빠 품에 안겨 작은 창밖의 빙하를 구경하기도 했었지. 아빠는 젊고 패기에 차있었고 가슴을 활짝 펴고 랄라를 안고 비행기 안을 두루두루 걸어 다녔지. 해피 바이러스 랄라 훈장을 가슴에 달고 말이야. 엄마는 아직 새댁 냄새가 폴폴 났었고 체력은 비록 따라주지 않았지만 랄라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가득했던 시절.
이제 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랄라는 더 이상 아빠가 곁에 없어도 찾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보채지도 않는 씩씩한 소녀로 성장했구나. 하지만 아빠한데 어울리는 향수를 고르는 너의 눈망울 속에서 엄마는 랄라의 변함없는 아빠의 대한 사랑을 읽는다. 그동안 건강히 잘 자라줘서 고맙다. 혼자서 뭐든지 해보려고 하는 랄라의 독립성과 아무리 작은 선택이라도 본인의 언행에 책임 지려고 하는 랄라를 보며 엄마는 흐트러진 자신의 도덕성의 옷매무새를 고쳐보곤 한단다.
두 달 간 우리는 네 개의 다른 나라를 여행했고, 백 명의 가까운 사람들을 만났고, 몇 개의 공연을 함께 관람했고, 셀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지. 엄마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자양분이 되어준 건 책과 음악과 여행이었단다. 어떻게 보면 아빠와의 만남도 여행과 음악 때문에 맺어진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세상의 모든 엄마 마음이 그러하듯이 엄마도 랄라에게 좋은 것을 나눠주고 싶어. 엄마가 갖은 것을 나눠준다는 표현보다는 나의 좋은 경험들을 너와 함께 나누고 싶다는 표현이 더 옳은 것 같구나.
여행은 우리의 내면적인 성장을 돕고, 삶을 활기차게 해주고, 무엇보다도 가족과 친구와 집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지. 그래서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좀 더 겸손해진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란다. 엄마가 랄라에게 여행의 중요성을 거듭 말로 강조하기보다는, 이렇게 긴 시간 집을 떠나 있으면서 랄라가 몸소 느끼게 되는 크고 작은 변화야말로 너의 내면적인 성장에 더 큰 의미를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어쩌면 간접경험의 한계를 고하고 싶은 마음에 생겨난 가르침의 한 말씀일지도 모르지...
랄라야. 엄마는 네가 똑똑한 우등생이 되기를 바라본 적이 없단다. 그렇다고 착하디착한 천사표 랄라가 되기를 바라본 적 또한 없다. 엄마는 랄라가 지성과 감성의 균형을 스스로 잡을 수 있는 성인으로 자라주길 바란다. 훗 날 너의 종교관이 확립되어 영성의 영역 또한 너의 삶과 함께 깊어간다면, 랄라는 엄마. 아빠가 없어도, 안락한 집이 없어도, 세계 어느 곳에서든, 누구와 함께 있던, 늘 평정심과 청정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될 거야. 지금 곤히 잠든 랄라를 바라보며 엄마는 너에 대한 믿음이 샘솟는 걸 느낄 수 있어. 우리 랄라는 충분히 지성과 감성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성장할 거야. 아가야. 고운 꿈 꾸고 잘 자려무나.
아홉 시간 후면 랄라를 끔찍이 사랑하는 아빠가 두 팔 벌려 힘껏 안아주실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