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19, 2014

커피를 내리며



약일전부터 평소 애용해 왔던 에스프레소/커피 메이커를 치우고,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고 있다. 우리 집 가전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무렵이 아닌가 싶다.

올봄, 전자레인지가 고장이 났고, 난 그것을 계기로 새 전자레인지를 장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주방가전의 기본 품목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전자레인지이기에, 마땅히 한자리 지키고 있어야 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런 관념 또한 하나의 "틀"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 전자레인지 없이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이제 겨울을 맞이하고 있지만, 난 불편함보다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그런 신선한 경험을 하며 지낸다.

예를 들면 랄라와 함께 쿠키나 케이크를 만들 때 버터는 전자레인지에 넣어 녹여왔는데, 이제는 끓는 물을 중간 크기 사발에 담고, 그보다 작은 사발에 버터를 넣어 녹인다. 랄라가 작은 숟가락으로 막대 버터를 휘-휘- 저으며 녹이는 모습을 난 바라보고 있다. 열에 의해 버터가 서서히 녹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아무 생각 없이 단 몇 초 만에 녹아버린 버터를 전자레인지에서 꺼내던 지난날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과정보다는 결과에, 기다림보다는 "빨리빨리" 가 우선시 되었던 나의 삶의 순간들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 집 믹서기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전에 김치를 담글 때 나는 양파, 마늘, 배, 사과, 생강, 젓갈류를 믹서기에 넣고 스르르 단숨에 갈아 양념을 만들었다. 지금은 강판으로 채소와 과일들을 천천히 갈아서 양념을 만든다. 젓갈도 베 보자기로 꼭 짜서 사용하고 있다. 버튼 한번 누르면 환상의 속도로 모든 재료를 섞어서 갈아주던 믹서기보다, 조금 느리지만 깨끗하게 씻어놓은 채소들의 감촉을 느끼며 신선한 즙을 낼 수 있는 강판이 더 고맙게 여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난 양파면 양파, 사과면 사과, 매 순간 한 가지의 재료에만 나의 마음을 내어주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고, 너무 쉽게 중독되었다.

그럼 다시 커피 이야기로 돌아와서, 내가 배운 핸드드립 커피의 기본은 20초 동안 소량의 물로 커피를 적셔서 뜸을 들인 후, 향과 맛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되도록 2분 안에 커피를 내리도록 권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난 커피를 내릴 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올린다. 특히 첫 뜸을 들이는 20초가 주는 의미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신영복 교수는 <더불어 숲>에서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는 일찍부터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나 후회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만나 그/그녀를 알아가고 관계를 맺어 감에 있어, 온전히 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듣고, 그/그녀만의 느낌을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난 생각한다. 매 순간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우리는 어느 누군가에게 20초간의 올곧은 집중을 해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을까? 만약에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분명히 20초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2분 20분 2시간 그렇게 어느 한 대상에게 깊이 빠져드는 그 오묘한 느낌이 가져다주는 강한 중독성의 맛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발 더 물러서 생각해보면, 그 관계의 중독에 빠져 너무 오랫동안 허우적대는 모습도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드립 커피를 내려야 하는 2분이 주는 의미는 바로 그와 비슷하다. 이미 우려낸 원두커피에 자꾸만 뜨거운 물을 붓는다고 마술처럼 감미로운 커피가 계속 샘솟듯 우려지지는 않는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여서, 이미 상대방의 관심과 애정이 고갈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편이 집요하게 물질적, 감정적 헌신을 자처한다 해도 사랑과 행복은 추출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최대한의 예우로 상대에게 내 마음을 다하되, 어느 순간이 되면 상대를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고 다시 신선한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여정이 진지하면 할수록 재회의 기쁨은 더 고양될 것이다. 영원한 매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一期一會의 참뜻을 마음으로 새기고, 진솔한 省察의 시간과 自利利他의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만이 혼탁해진 영혼을 정련할 기회를 얻게 될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새로운 美力으로 상대의 가슴에 설렘을 일으키고, 한층 깊어진 영혼과 마주하는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