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돌을 넘기지 않은 내가 할머니 옆에 서있는 모습. 나와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해 몸을 낮추어 앉은 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유난히 고운 할머니의 피부가 눈부시다. 우윳빛을 띄는 피부를 가진 우리 할머니야말로 피부 미인의 원조시다. 할머니의 살은 보드랍고 촉촉하고 포근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자꾸 비비고 있으면 스르르 잠이 쏟아지고는 했다. 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손이 더듬어 찾던 할머니의 살.
이제는 꿈이 되어 버린 나의 할머니!)
나의 사랑 나의 할머니,
할머니의 여든 번째 생신을 축하합니다.
할머니께서 살아오신 팔십 년 인생 속에 꼬박 37년이라는 세월을 할머니와 함께 해 온 제가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저의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 속에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는 할머니께서 선물해 주신 그 아름다운 추억을 먹고삽니다. 그 당시 우리는 함께 눈을 뜨고, 함께 잠자리에 들고, 함께 수저를 들고, 함께 장을 보고, 함께 나들이를 가고, 함께 웃고, 함께 울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고,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혜와 인내로 인도해주셨고, 진심으로 저를 아끼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37년간 할머니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 속에서 늘 배불렀습니다. 할머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때로는 힘들고 괴로왔던 시간들이 할머니를 매섭게 할퀴고 지나가고, 희망을 져버리고, 웃음과 건강을 빼앗아 가기도 하였지만, 저는 할머니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할머니께서 태어나 주셨기에 저희 엄마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고, 더불어 저도 할머니의 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분입니다. 저의 존재의 뿌리는 할머니입니다. 비단 할머니께서는 저에게 혈육으로써만 의 뿌리가 아닙니다. 제가 매일매일 보다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할 수 있는 건 할머니의 손녀로서 부끄럽지 않은 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제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할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또 하나의 뿌리가 되어 저와 할머니를 굳건히 하나로 연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저에게 할머니 같은 분은 안 계십니다. 할머니의 체온, 할머니의 살갗, 할머니의 손길, 할머니의 눈빛, 할머니의 냄새, 할머니의 영혼은 언제 어디서나 늘 저와 함께 합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슬픈 인생사와 남몰래 흘린 눈물의 나날들도 저와 함께 합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을수록 할머니를 향한 저의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의 기억들도 더욱 또렷해집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미루어 짐작건대 아마도 할머니와 저는 전생에 부모 자식 지간이었거나, 사랑했던 부부였거나, 우애 깊은 자매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께서는 당신이 생각하시는 것 보다 훨씬 강하고, 아름답고, 지혜롭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는 할머니보다 예의범절의 중요성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가치를 더욱 훌륭하게 가르쳐주신 스승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할머니께서 저희 곁에서 건강히 오래오래 계셔주시는 것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며 최고의 선물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할머니께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할머니를 사랑하고 할머니께 사랑받고 싶습니다.
어느 순간 할머니께서 혼자라고 생각되실 때,
아픈 육신이 짐으로 여겨지실 때,
자꾸만 서럽고 서글퍼지실 때,
할머니 저를 떠올려 주세요. 할머니 다시 말씀드리지만, 할머니는 저의 존재의 뿌리입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신앙과도 같으며, 깜깜한 바다 위에 빛나는 등대와도 같으며, 제 마음의 영원한 집입니다. 할머니 아프신 거 훌훌 털어버리시고, 봄이 오면 흐드러지게 피어날 산과 들의 꽃처럼 그렇게 화려한 변화가 할머니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올해 한국의 봄이 유난히 늦은 이유도, 아마 할머니께서 오랫동안 감기로 힘들어하시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다시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머니의 손녀여서 저는 37년간 늘 행복했습니다.
2010년 3월 20일 (음력 2월 5일)
할머니의 산수를 맞이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