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읽은 중용(中庸)을 재독 하였다. 그때는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지
않았던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덕분에 묵은 책을 다시 한번 읽는데 마치 새 책을 마주하듯 깨끗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뒤뜰을 정리하면서 아바타 나무라고 이름 붙여진 고목의 밑동을 좌선하기
좋은 높이로 베어 달라고 부탁드린 지도 2주나 흘렀다. 당시는 나무의 둥치를 살갑게 쓰다듬으며 다음날 새벽부터라도 그곳에서 좌선을 시작하리라 마음먹었건만, 결국은 혼잣말만 앞섰을 뿐 행동은 뒤따르지 못했다.
중용의 “언고행 행고언 言顧行 行顧言”을 읽어내려가며 유난히 가슴이 뜨끔했던 이유도, 근래에
있었던 이 경험이 나의 옹졸한 양심을 툭툭 건드렸기 때문이다.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이 가르침은 언행의 조화와 상호관계를 당부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
밤, 나는 자신에게 덜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자, 아바타 나무를 찾아가 양해를 구하고 조용히 자리를 잡은 뒤 좌선을 시작했다. 이웃집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과 곁을 지키던 촛불만이 내 몸을 어디에 의지하고 있는지 식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좌선을
마치고 무릎을 모은 뒤 하늘을 올려다보니, 반짝이는 별들이 깊고 푸르른 밤의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순간
시험준비를 핑계로 일 년 가까이 나의 궤도를 벗어나 헛발질을 일삼고 있었던 자신과 마주했다. 다행히 나는 시험에 합격했고,
이전보다 더욱 안정된 자리를 보장받았건만, 정작 마음은 떠돌이 생활을 접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뗏목을 타고 무사히 강을 건넜으면 고마운 마음으로
뗏목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 무거운 뗏목을 혼자 머리에 이고 산과 들로 헤매다니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찰나의
깨달음은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묻고 배우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진정한 문학(問學)을 체험한다. 그럼 내가 추구하는 배움의 길이란 무엇일까? 감히 말하자면 변화(變化)에 대한 자사(子思)의 해석처럼 ‘변(變)’에 머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화(化)’로 나아갈 수 있는 ‘성(誠)’의 불씨를 죽이지 않는 노력, 그리고 마침내 ‘화(化)’를 이루어내는 그 길(道)을 걸어가고 싶다.
“지성무식(至誠無息),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
이 한마디는 나에게 크나큰 위안이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신념을 일깨워주는 한 줄기 빛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