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1, 2018

유리알 유희



평소 냉소적이던 내담자를 상담에 꾸준히 참여하게 만드는 비결이 뭐예요?” 나의 상담 일정을 알고 있는 동료 분이 가끔 던지는 질문이다. 때로는 정신건강 워크숍이나 세미나에 참석한 분들로부터 호기심 질문을 받을 때도 있다. “선생님만 알고 계신 상담의 비결이 뭔지 알려주세요.” “심리치료는 필요한가요?” “남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지치지 않으세요?”

심리상담치료를 시작한 어언 년이 흐른 지금에야 이런 질문을 받으면 미소로 답할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물론 전의 나는 누가 상담에 관해 물어오면 감정이 고양되어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것이 심리치료를 향한 나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겼고, 그렇게 해서 보다 많은 분께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리고 싶었다. 원래 사람은 얕게 알수록 말이 많아지고 호언장담하는 실수를 범한다. 돌아보면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경솔로 인해 반복되는 후회와 반성이 가져오는 실의도 그만큼 깊어갔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설익은 언행은 나의 욕심과 무지로부터 비롯되었다. 타인의 문제를 나의 것으로 착각한 우매한 소유욕, 지식과 경험을 대중에게 알려 그들이 나를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명예욕, 그리고 무엇보다 '무지의 지'를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빚어낸 산물이다. 지금 자리에서 반추해보면 또렷이 보이는 불찰이 그때는 보이지 않았을까?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나오는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그가 깊이 존경하는 음악 명인에게 묻는다. “진실이란 없는 걸까요? 진정한 궁극의 가르침이란 없는 걸까요?” 그러자 음악 명인은 이렇게 답한다. “진리는 분명 있네. 그러나 자네가 바라는 가르침,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그것만 있으면 지혜로워지는 가르침이란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완성을 바라야 하네. 신성은 개념이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안에 있어.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나는 부분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고 읽었다. 특히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라는 부분을 조용히 되뇌는 동안 언제부터인가 진리라는 대신 사랑, 용서, 치유, 공감이라는 단어를 넣어 문장을 완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의 어느 단어를 넣어도 크네히트의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고자 했던 문맥의 흐름을 크게 거스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위에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도 나는 수행을 통해 나 자신의 완성을 이루고 싶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 첫날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